박물관 다큐멘터리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복원하는 데 수개월이 걸린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도 처음엔 "이게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일까" 싶었는데, 직접 겪어보니 그 답은 생각보다 훨씬 묵직했습니다. 약 2,000년 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불에 타 탄화된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AI 기술로 가상 복원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날 다큐에서 받았던 감동이 다시 한번 밀려왔습니다.
AI가 해낸 가상 언롤링, 2,000년 만의 귀환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불에 타 형체만 남은 두루마리를 물리적으로 펼치지 않고 내용을 읽어낸다는 발상 자체가 처음엔 공상처럼 들렸으니까요. 그런데 실제로 해냈습니다.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컨퍼런스에서 발표된 이번 성과는 관계자들이 직접 "역사적인 돌파구"라고 표현할 만큼 무게가 달랐습니다.
핵심은 가상 언롤링(Virtual Unrolling)이라는 기술입니다. 가상 언롤링이란 탄화된 두루마리를 CT 스캔으로 층층이 촬영한 뒤, AI가 꼬불꼬불 말린 섬유층을 디지털로 펼쳐 평면화하는 과정을 말합니다. 종이를 손으로 건드리지 않으니 유물이 부서질 위험이 없습니다. 저도 AI가 오래된 사진 해상도를 높이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그 기술이 이렇게 먼 곳까지 닿았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번에 완전히 복원된 두루마리는 PHerc. 1667로, 높이 약 8cm, 지름 약 2cm의 작은 조각입니다. 원래 크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이 단편이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습니다. 연구팀은 이 두루마리에서 20개 열, 약 1.5미터 길이의 텍스트를 읽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두루마리가 발견된 헤르쿨라네움의 빌라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이 소유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유일한 대규모 도서관 소장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Vesuvius Challenge).
나폴리 페데리코 2세 대학교의 파피루스학 조교수 페데리카 니콜라르디는 이 두루마리가 기존 시도에서 가독성 점수 0점을 받았던 유물이라고 밝혔습니다. 파피루스학(Papyrology)이란 고대 파피루스 문서를 해독하고 분석하는 학문으로, 전통적으로 극도의 인내와 수작업이 요구되는 분야입니다. 그런 전문가조차 포기했던 두루마리를 AI가 다시 열어젖힌 셈입니다.
이 프로젝트는 베수비오 챌린지(Vesuvius Challenge)라는 이름으로, 켄터키 대학교 컴퓨터 과학 교수 브렌트 실스와 기업가 냇 프리드먼, 다니엘 그로스가 2023년에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 연구자들이 CT 스캔 데이터를 바탕으로 두루마리를 가상으로 복원하고 해독에 도전하도록 장려하는 방식입니다(출처: CNN).
- CT 스캔으로 탄화된 두루마리 내부를 층별로 촬영
- AI 머신러닝 모델이 스캔 이미지에서 잉크 흔적을 식별
- 가상 언롤링으로 물리적 손상 없이 텍스트 평면화
- 파피루스학 전문가팀이 복원된 텍스트를 해석 및 번역
불 속에서 꺼낸 스토아 철학, 그 말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
저는 복원 기술 자체만큼이나, 복원된 내용이 무엇인가에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그 문장이 윤리와 인간 행동에 대한 철학적 논의라는 점이 묘하게 마음을 건드렸으니까요. 제 경험상 오래된 텍스트를 읽다 보면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에 말을 거는 문장과 마주치는 순간이 있는데, 이번에도 딱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복원된 텍스트에는 스토아 철학의 핵심 개념인 호르메(Hormé)에 관한 논의가 담겨 있습니다. 호르메란 인간의 충동, 즉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려는 내적 욕구를 뜻하는 그리스어 개념입니다. 익명의 저자는 이 충동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면 해로운 감정에 휩쓸리거나 본래 목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2,000년 전 사람이 한 말인데, 현대 심리학의 자기 조절 이론과 놀라울 정도로 겹쳐 보입니다.
또 하나 등장하는 개념이 프로네시스(Phronesis)입니다. 프로네시스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하고 스토아 철학이 계승한 '실천적 지혜'로, 단순히 지식을 아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맞게 올바른 행동을 판단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가리킵니다. 번역된 본문에는 "우리가 어떤 것을 탐구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 자신과 우리 본성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을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한 줄만으로도 복원 작업의 의미가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 또 다른 탄화 두루마리인 PHerc. 139에서는 "필로데무스, 신들에 관하여, 제8권"이라는 문구가 해독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리스 철학자 필로데무스의 저서 "신들에 관하여(On Gods)"가 최소 8권으로 구성된 시리즈임이 처음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이 저작의 제1권만 알려져 있었는데, 한 번의 복원으로 연구 지형이 완전히 바뀐 셈입니다. 제가 다큐에서 봤던 "문서 한 장이 역사를 바꾼다"는 표현이 이렇게 실감 나게 적용될 줄은 몰랐습니다.
브렌트 실스 교수는 이제 프로젝트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말합니다. 이미지 처리와 머신러닝의 영역을 넘어, 이제는 고대 텍스트를 읽고 편집하고 해석할 수 있는 인문학 전문가가 더 필요한 시점이라는 것입니다. 기술이 문을 열면, 결국 그 문 너머를 해석하는 건 사람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저는 AI 하면 늘 '미래를 만드는 기술'이라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습니다. 그런데 이번 일을 보면서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AI는 미래를 만드는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과거를 되돌려주는 기술이기도 하다는 것을요. 2,000년 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기록해둔 생각이 화산재와 불길을 뚫고 다시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 그게 저는 가장 오래 남습니다.
아직 헤르쿨라네움 소장품에는 해독을 기다리는 두루마리가 수백 개 남아 있습니다. 앞으로 베수비오 챌린지가 만들어낼 다음 발견이 어떤 내용일지, 저도 계속 지켜볼 생각입니다. 역사와 기술이 교차하는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생기셨다면, 베수비오 챌린지의 공개 데이터와 진행 상황을 직접 확인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참고: https://edition.cnn.com/2026/06/26/science/papyrus-scroll-vesuvius-ai-scli-int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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