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제비 뽑기를 하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저는 그게 그냥 종이쪽지 몇 장으로도 충분히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습니다. 도구가 아무리 단순해도 결과를 기다리는 그 긴장감만큼은 진짜였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발표된 연구 결과를 접하고 나서, 그 두근거림이 1만 2천 년 전 사람들도 똑같이 느꼈을 거라는 생각에 묘하게 소름이 돋았습니다.
이진 주사위, 눈앞에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수십 년간 발굴해 온 유물 중에 이미 주사위가 섞여 있었는데, 아무도 그렇게 분류하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번 연구의 핵심은 '이진 주사위(binary lot)'라는 개념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진 주사위란, 두 면만 존재하는 납작한 형태의 주사위로 오늘날 동전 던지기와 원리가 같습니다. 쉽게 말해, 앞면이냐 뒷면이냐 두 가지 결과만 나오는 가장 단순한 형태의 확률 도구입니다. 이 유물들은 나무나 뼈로 만들어졌으며, 와이오밍·콜로라도·뉴멕시코의 폴섬(Folsom) 시대 유적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연대는 약 12,800년에서 12,200년 전으로 추정됩니다.
콜로라도 주립대학교의 고고학 박사 과정생 로버트 J. 매든은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 물건들이 정말 주사위로 쓰였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는 인류학자 스튜어트 쿨린이 1907년에 수행한 분석, 즉 역사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주사위 293세트를 식별한 연구를 기반으로 4단계 판별 테스트를 직접 고안했습니다. 물체의 형태, 각 면의 표식, 대칭성 등을 기준으로 이진 주사위 여부를 판단하는 방식입니다. 이 테스트를 통해 미국 서부 45개 선사 시대 유적지에서 600개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 주사위 세트가 새롭게 확인되었습니다(출처: American Antiquity).
이 연구에서 제가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바로 이 대목입니다. 증거는 이미 거기 있었는데, 분류 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주사위라고 부르지 못했다는 것. 보는 틀이 달라지면 같은 유물도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게임 고고학이 밝혀낸 것들
게임 고고학(game archaeology)이라는 분야가 있습니다. 여기서 게임 고고학이란, 과거 인류가 어떤 놀이 문화를 가졌는지를 유물과 유적을 통해 연구하는 고고학의 세부 분야입니다. 쉽게 말해, 게임과 놀이의 역사를 땅속에서 파내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이 분야는 지금까지 "중요하지 않은 연구"로 오랫동안 주류 고고학에서 밀려나 있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 시각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됐습니다. 생존과 직결된 도구나 건축물에 비해 게임 도구가 덜 중요해 보이는 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이번 연구 결과를 보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놀이를 한다는 것, 규칙을 만들고 결과를 기다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당한 인지 능력과 사회적 상호작용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연구가 밝혀낸 핵심 포인트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전통적인 다면체 주사위(육각형)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이진 주사위가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 아메리카 원주민의 이진 주사위는 점술보다는 도박과 확률 게임에 거의 전적으로 사용되었다.
- 서아시아, 남아시아, 북아프리카에서도 조개껍데기나 양의 발목뼈 같은 자연물을 이진 주사위처럼 사용한 오랜 전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 이 테스트 방법은 아메리카 원주민 주사위뿐 아니라 전 세계의 미분류 고대 게임 도구에도 적용될 수 있다.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교의 고대 게임 전문가 발터 크리스트 교수는 이 연구가 "아메리카 대륙뿐 아니라 전 세계 선사 시대 고고학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연구는 처음 접했을 때 사소해 보여도, 인류 전체의 그림을 다시 그리게 만드는 힘이 있더라고요.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캘리포니아 대학교 데이비스 캠퍼스의 인류학 교수 젤머 에르켄스는 "직사각형 모양이고 손에 쏙 들어간다고 해서 무조건 휴대전화인 것은 아니다"라는 비유로 이 연구의 논리적 허점을 지적했습니다. 유물이 어디서, 무엇 옆에서 발견되었는지 같은 고고학적 맥락(context)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고고학적 맥락이란 유물 자체의 특성뿐 아니라 출토 위치, 주변 유물과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 지적도 타당하다고 봅니다. 한 가지 기준만으로 유물의 용도를 단정하는 건 어느 분야에서나 위험하니까요.

확률의 역사, 수학이 아니라 놀이에서 시작됐다
확률론(probability theory)은 1654년 프랑스 수학자 블레즈 파스칼과 피에르 드 페르마가 체계적으로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기서 확률론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을 수치로 나타내고 분석하는 수학 이론입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확률 계산의 기초가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그런데 이번 연구는 흥미로운 역전의 시각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확률이라는 개념을 수학적으로 정리하기 훨씬 이전부터, 그러니까 이론이 생기기 수천 년 전부터 이미 몸으로 확률을 경험하고 즐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꽤 오래 생각에 잠겼습니다. 수식이 없어도, 개념어가 없어도, 인간은 이미 '어느 쪽이 나올까'를 알고 싶어 하고 그 불확실성을 즐겼다는 뜻이니까요.
제가 친구들과 제비 뽑기를 할 때도 아무도 확률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종이를 집고, 펼치고, 결과에 웃고 탄식했습니다. 그 감각이 1만 년 전 사람들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드니, 솔직히 말해 꽤 뭉클했습니다.
전통적인 6면체 주사위는 청동기 시대,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계곡에서 발굴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출처: Smithsonian Magazine). 하지만 이번 연구가 맞다면, 형태는 달랐어도 '던지고 결과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는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셈입니다. 물질문화는 진화하지만, 그 밑에 깔린 인간의 욕구는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일관되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이 연구가 말하고 싶은 건 단순한 연대 측정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서로와 상호작용하고, 작은 우연 속에서 재미를 찾고, 규칙을 만들어 함께 즐겨왔다는 것. 게임의 형태는 바뀌어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음에 친구들과 제비 뽑기를 할 때, 그 찰나가 1만 년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걸 한 번쯤 떠올려볼 것 같습니다.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연구가 실린 학술지 American Antiquity의 원문도 한번 찾아보시길 권합니다. 전공자가 아니어도 고고학적 발견이 어떻게 해석되고 논쟁되는지 그 과정 자체가 꽤 읽을 만합니다.
참고: https://edition.cnn.com/2026/04/08/science/native-american-earliest-dice-gambling-probabi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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